주흘산 등반길에 함께 트랙킹을 한, 문경새재의 제1관문에서 제2관문까지의 사진 설명입니다.
제 1관문 통과후 주흘산 주봉.영봉.부봉을 등반후 다시 제2관문으로 하산하면서 촬영한 사진이라 순서가 뒤죽박죽입니다.

본문


문경새재안내도
명소 |
설명 |
1. 선비상 |
전통사회의 구심점이었던 선비의 의식과 정신을 상징 |
2. 신길원 현감비 |
(지방유형문화재 제 145호) 임진왜란때 순직하신 신길원 현감의 비 |
3. 문경새재박물관 |
이 고장 선조들의 문화유산을 전시 |
4. 자연생태공원 |
생물의 다양성확보와 자연환경보전의식 고취를 위한 자연체험장 |
6. 영남제1관 |
주흘관(사적 제147호) : 숙종 34년(1708)설관 |
7. 성황당 |
병자호란 당시 지천 최명길과 여신과의 전설이 있는 곳 |
8. 신길원 현감 충렬사 |
신길원 현감의 위패를 모신 사당 |
9. 여궁폭포(파랑소) |
20m의 장대한 폭포, 일명 여심폭포(女心瀑布) |
10. 혜국사 |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한 곳으로 전해지는 신라시대에 건립된 사찰 |
11. 대궐터 |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행재소(대궐)를 세운 터 |
12. 경북 개도100주년 타임캡슐 |
경북도민의 생활상등 자료매설 |
13. 선정비군 |
관찰사나 현감등 관리들의 선정을 기념하는 비(碑) |
14. 산신굴 |
주홀산의 산신인 호랑이가 살던 곳으로 전하는 바위굴 |
15. 망치등 |
봉수대와 망루가 있던 능선으로 전하며 포루라는 기록도 보임 |
16. 문경새재오픈세트장 |
세계 최대규모의 사극촬영세트 |
17. 조산 |
마을의 안녕과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돌무덤 |
18. 혈지른자리 |
임진왜란시 큰 인물이 날 자리라고 하여 혈을 질렀다고 하는 곳 |
19. 등룡정 |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이 무예를 익히던 활터를 재현한 KBS촬영세트 |
20. 마당바위 |
가로 5m,세로 4m정도로 마당같이 평평한 타원형의 바위 |
21. 지름털바우(기름틀바위) |
기름을 짜던 틀처럼 생긴 바위 |
22. 조령원터 |
조선시대 길손들의 숙박과 물물교환장소로 사용 |
23. 무주암 |
무인주점이 있던 장소로 전하며 조령산 능선의 경관이 잘 조망됨 |
24. 상처난소나무 |
일제말기 일본군이 한국인을 동원하여 송진을 채취하던 자국이 남은 소나무 |
25. 주막 |
새재길을 넘다 피로에 지친 몸을 한잔 술로 여독을 풀던 곳 |
26. 팔왕폭포(용추) |
시인,묵객(墨客)이 즐겨 찾았던 경승지(궁예 최후의 장면 촬영지) |
27. 꾸구리바위 |
계곡 바위속에 꾸구리가 있어 아가씨가 지나가면 희롱하였다고 함 |
28. 소원성취탑 |
장원급제, 부자, 출생, 쾌유 등을 기원한 돌탑 |
29. 교귀정 |
체임하던 신,구관찰사가 관인을 인수인계하던 곳 |
30. 기도굴 |
조선시대말 기독교인들의 비밀 예배장소로 추정되는 바위굴 |
31. 산불됴심비 |
조선시대 설치된 한글로 된 산림보호비(문화재자료 제226호) |
32. 조곡폭포 |
주흘산 깊은 계곡의 맑은 물이 흐르는 45m의 3단 폭포 |
33. 주흘산 |
해발1,106m로 조선시대 문경현의 진산 |
34. 영남 제2관 |
조곡관(사적 제147호)선조 27년(1594)에 설관 |
35. 조곡약수 |
길손의 갈증을 풀어주는 명약수 |
36. 시가 있는 옛길 |
조선시대 새재를 넘던 선비들의한시를 감상할 수 있는곳 |
37. 문경새재아리랑비 |
문경새재 물박달나무에 얽힌 민요를 새긴 비 |
38. 바위굴 |
새재길을 지나는 길손들이 비를 피하던장소,새재우의 전설이 있는곳 |
39. 귀틀집 |
산악지대에서 사용되던 한국식 통나무집 |
40. 조령산 |
해발1,026m로 백두대간에 위치한 명산 |
41. 이진터 |
임진왜란때 신립장군이 진을 쳤다고 전해지는곳 |
42. 동화원 |
조령원과 같이 길손들의 숙식을 제공하던곳 |
43. 책바위 |
각종 시험들에 합격을 기원하는 돌탑 |
44. 장원급제길 |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던 청운의 길 |
45. 조령약수 |
새재정상에서 솟아나는 백수령천(百壽靈泉),낙동강 3대 발원지의 하나 |
46. 군막터 |
조선시대 조령관을 지키던 군사들의 대기소 |
47. 마패봉 |
해발925m의 백두대간으로 일명 마역봉이라고도함 |
48. 부봉 |
해발917m의 바위산으로 노송이 유명함 |
49. 영남 제3관 |
조령관(사적 제147호) 숙종 34년(1708)에 설관

|
(글 맨 하단 문경새재 지도 추가)

문겨새재 입구 제 1관문


옛길 박물관





제1 관문


제1 관문 뒤로 주흘산이 보입니다.

멀리 조령산도 보입니다.



제1관문 파노라마

충렬사

혜국사(주흘산 등반길에 있습니다)

)
문경읍 상초리 여궁폭포를 지나서 주흘산 기슭에 있다. 847년(신라 문성왕8년) 보조국사가 창건하여 당초 법흥사(法興寺)라고 하였다. 도승(道僧), 청허(淸虛) 송은(松隱)대사가 고려조에 공을 쌓았고 공민왕이 난을 피해 법흥사에 행재(幸在)하여 국은(國恩)을 많이 입었다고 해서 혜국사로 개칭했다고 전한다.
1873년 송장, 지성 두 선사가 일부 중수하였다. 금강문(金剛門)은 1977년에 건립하였고 대웅전 단청은 1973년에 실시하였으나
1989년 대웅전 등 3동을 다시 중수하였다. 1979년 신중 탱화에서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나와서 봉안하고 있다.
속암으로는 안정암이 있으며 옛부터 혜국사를 오르던 길에는 자영당대사성연출세탑, 혜월당여상지탑, 해월당탑, 연곡당사신지탑의 부도가 있다.



제2 관문





조곡폭포..산불됴심비에서 200m 위치에 있는 조곡폭포는 산수 수려한 주흘산 깊은 계곡에서 떨어지는 20m의 3단폭포이다.


산불됴심비


이 비는 상초리 산42-8번지에 있다. 교귀정을 지나 제2관문을 못미쳐 노변의 오른쪽에 세워 있다. 다듬지 않은 돌(높이 183㎝, 폭 75㎝ 정도)에 "산불됴심"이라고 한글로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퍽 오래된 조선조 후기의 것으로 추측된다. 정조 때 별장이 잡인의 통행을 단속할 때 역시 관방(關防)유지를 위해서는 산불조심이 무엇보다 급선무였고 일반서민이 잘 알도록 한글 비를 세우지 않았나 생각된다. 자연보호의 시금석(始金石)이고 「조심」을 고어(古語)인 「됴심」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기 드문 한글 비이며 지방문화재 자료 제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령원터
%ea%b3%bc+%eb%8f%99%ed%99%94%ec%9b%90(%e6%a1%90%e8%8f%af%e9%99%a2))
지금 조령원으로 전하는 제1관문에서 1㎞ 정도 떨어진 원터가 동화원이며 새재아래 동화원이라는 마을에 조령원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문을 원터를 발굴한 신영훈 전문위원이 제기한 바 있다.
1530년(중종25) 이행 등이 증보 개정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조령원은 새재의 고개 동쪽에 있다고 해서 지금의 동화원 동리를 지칭하고 동화원은 현의 서북쪽 15리에 있다고 하여 지금 조령원 터의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 문경현지에서는 위치의 기록이 없고 열 개의 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라고 간단히 적고 있다.
16세기로 추정되는 필사본 지리지에는 조령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와 같이 조령의 동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동화원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같이 서북쪽 15리에 있으며 동화원과 함께 석담을 쌓았으나 지금은 폐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당시에 조령원, 불정원, 화봉원은 사용되고 있었고 관음원, 회연원, 동화원, 견탄원은 폐지됐다는 기록을 남긴 점으로 보아 일부 원(院)만이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제1관문 안에 조령진(鳥嶺鎭)과 산성창(山城倉)을 두자 원의 기능이 불필요하게 되어 동화원이 먼저 폐지되고 그곳에 거주하던 사람이 조령원(현 동화원 마을)으로 옮겨 살며 옛 그대로의 원이름을 사용해서 혼돈이 오지 않았나 추측된다. 그러나 와전된 원의 명칭이 계속 사용되었는지는 증명할 수 없다. 1927년에 제작된 조령편람(鳥嶺便覽) 현판에는 조령원에 담장이 상존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어 지금까지 조령원으로 전하나 이는 잘못으로 생각된다. 원터는 1977년 8월과 12월 두차례에 걸쳐 300만원의 사업비로 신영훈, 홍사준 전문위원이 발굴하였다. 여기에서 고려시대 온돌(溫突) 유지(遺址)가 나타나 북방에서 시작된 온돌이 남점(南漸)하는 자료로 건축사에 중요한 사료(史料)로 평가되며 그 외에도 와편, 토기편(土器片), 자기편(磁器片), 어망추, 사금파리어음, 숫돌 수정편(水晶片), 철재 화살촉, 청동머리꽂이, 철재가위, 담뱃대, 부시, 손칼, 엽전, 마령(馬鈴), 말발굽쇠, 정, 자갈 마제도구(馬蹄道具), 화금, 문고리 등이 출토 되었다. 1978년에는 신영훈 전문의원 집필로 발굴조사보고서를 문경군에서 발간하였다. 원터의 석문과 석담(石垣) 축성방식이 동로면 명전리의 작성(鵲城)과 꼭 같다. 석문의 방형석주(方形石柱)며, 지방(地枋)과 인방(引枋) 천장석 상하의 문지도리 홈의 규모가 같고 석담을 거랭이질하여 엇물리게 쌓는 방법이 또한 그러하다. 작성(鵲城)은 동로면 명전리 황장산(黃腸山)에 계곡을 막아 축성하였다. 공민왕이 대지 국사의 안내로 난을 피해 황장산 부근에 체류(滯留)할 때 작장군(鵲將軍)이 쌓았다고 전하며 고구려 석성으로 추측되고 있다.




지름틀바위

문경새재 오픈세트장


+%eb%b0%8f+%eb%b6%88%eb%a7%9d%eb%b9%84(%e4%b8%8d%e5%bf%98%e7%a2%91))
비는 왕이 승하하면 장사 지내고 신하들이 임금의 덕과 공을 찬양하기 위하여 세우는 것이 원칙이다. 이 돌은 공덕을 표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고인들은 왕의 송덕비를 세웠다. 이것을 모방하여 군수나 현감에 대하여 참으로 그들의 시책이 잘 되어야만 비를 세워 공덕을 잊지 않게 하였다.
중국의 후한 때 오장이 군의 태수로 선정을 하였기 때문에 그가 죽은 뒤 묘 앞에 선정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것이 선정비의 시초가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충렬왕 때 양리(良吏) 최석이 선정을 하여 팔마비(八馬碑)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것이 또한 우리나라의 선정비의 시초인 듯 하다.
선정비의 글은 대개 일치하여 전 군수 누구의 영세불망(永世不忘)이니 송덕이니 하는 문자를 새겼다. 그 중 크고 글도 많이 새겨져 있는 것이 어쩌면 백성을 많이 울린 표본이 되기도 한다.어느 곳을 막론하고 예전 읍자리에 아직 십여개 혹은 수십개의 비석이 서 있어 선정의 허욕을 장식하고 있다. 선정비를 더욱 간수하고 옥석(玉石)을 가려 보관할 것을 보관하면 그래도 선인들의 뜻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1관문 뒤에는 당초 있던 비석과 관내에서 발견된 몇 기의 비석을 옮겨 20여기가 있다.

다시...제1관문


자연생태공원



아래는 예전 조령산 등반 때 문경새제의 하산지점인 제3관문의 참고사진입니다.
제3관문






-%ec%98%81%eb%82%a8%ec%a0%9c1%ea%b4%80(%ef%a6%ab%e5%8d%97%e7%ac%ac1%e9%97%9c))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숙종 34년(1708)에 설관 하였으며 영남 제1관 또는 주흘관이라고 한다. 정면 3칸(間)과 측면 2칸 협문 2개가 있고 팔작(八作)지붕이며 홍예문은 높이가 3.6m, 폭 3.4m, 길이 5.4m이며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이다. 좌우의 석성은 높이 4.5m, 폭 3.4m, 길이 188m이고, 부속 성벽은 높이가 1~3m, 폭 2~4m이다. 길이는 동측이 500m, 서측이 400m로 개울물을 흘러 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지니고 있다.
-%ec%98%81%eb%82%a8%ec%a0%9c2%ea%b4%80(%ef%a6%ab%e5%8d%97%e7%ac%ac2%e9%97%9c))
선조 27년(1594)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한 곳으로 중성(中城) 이라고도 한다.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하였으나 관(關)은 영성(嶺城 : 3관문)과 초곡성(草谷城 : 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鳥東門) 또는 주서문(主西門)을 설치하였다.
그후 1907년에 훼손되어 1975년에 복원하였다. 이렇게 복원한 문루를 옛 이름 조동문(鳥東門)이라 하지 않고 조곡관(鳥谷關)이라 개칭하였다. 누각은 정면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 있고, 팔작(八作)지붕이다.
홍예문은 높이가 3.6m, 길이 5.8m이다.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이다. 좌우의 석성 높이는 4.5m, 폭 3.3m, 길이 73m이고, 좌우의 성벽의 높이는 2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100m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