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경기 강원 등산기록/충청,경기도,수도권 산행기록

희양산(100대 명산 충북 괴산의 희양산 등산지도)

섬돌7 2015. 5. 26. 19:22

희양산 [曦陽山]

높이 : 996m
위치 : 충북 괴산군 연풍면

특징, 볼거리

경북 문경시 가은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를 이루는 희양산은 문경새재에서 속리산 쪽으로 흐르는 백두대간의 줄기에 우뚝 솟은 암봉이다.희양산은 그 모습이 우뚝하고 산 전체가 하나의 바위처럼 보이는 데다 바위 낭떠러지들이 하얗게 드러나있어 주변의 산에서 뿐만 아니라 먼 산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산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장쾌하고 아름답다. 봉암사가 자리한 봉암용곡 너머로는 대야산, 속리산 줄기가 거센 파도인 듯 날카롭게 솟아있다.봉암사 위의 백운곡은 무성한 숲속에 맑은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계곡으로 시원한 계류가 넓은 암반을 흐르고, 기암괴석, 폭포, 옥석대 바위에 있는 마애불좌상, 백운대 등이 절경이다.

 

산의 남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5년(879년)에 지증대사가 창건했다 하며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였다고 한다. 봉암사를 창건한 신라 헌강왕 때의 고승 지증대사는 전국 명산을 둘러본 뒤 이곳에 와 『산은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니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치며 올라가는 듯하고 계곡 물은 백 겹으로 띠처럼 되었으니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 듯하다』고 지세를 평하기도 했다고 한다

 

봉암사에는 지증대사적조탑비, 지증대사적조탑, 원오탑비, 정진대원오탑, 삼층석탑, 함허당득통지탑, 환적당지경지탑,상봉대선사비, 노주석, 백운대, 마애불좌상 등이 있다.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산 전체가 하나의 바위처럼 보이고 바위 낭떠러지들이 하얗게 드러나 있어 주변의 산에서뿐만 아니라 먼 산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으며 기암괴석과 풍부한 수량이 어우러진 백운곡 등 경관이 수려하고 마애본좌상 등 역사유적이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되었다

 

 

▼은티마을 등산 초입입니다. 희왕산의 등산지도 게시판이 보이네요..

등산코스는 은티마을-호리골재-구왕봉-지름티재-희왕산-성터-은티마을 원점회귀로 약 12km정도 걸은듯 합니다.

 

은티마을 등산기점입니다.

 

좌측으로 희양산 우측으로 구왕봉이 보이네요..산행은 구왕봉 우측편 호리골재로 진행합니다.

 

잘 지어놓은 펜션등이 보이네요..뒤로 보이는 봉우리는 백두대간이 지나는 희양산에서 시루봉쪽인데 사진과는 달리 등반로가 험하다고 하여

백두대간 종주하시는 분 외 당일산행하시는 분들은 잘 다니지 않는다고 합니다.

 

호리골재로 향하는 등반로입니다. 대략 3키로 정도 되는 폐기된 임도가 등반로이고 숲이 우거져 있기 때문에 아주 쾌적하게 산행이 시작됩니다.

 

호리골재 삼거리..죄측으로 구왕봉 우측으로는 악희봉으로 연결되는 백두대간길입니다.

 

호리골재에서 부터 약간 가파르게 2~30분 올랐을까?...드디어 구왕봉이 도착했습니다.

구왕봉까지 등반로는 초보자 코스입니다...구왕봉에서 희양산 정상까지 2km 남짓한 등반로가 백두대간길에서

험하기로 악명높은 구간중의 하나로 수많은 릿지구간에 로프로 열결되어 있습니다.

로프가 대략 20여 정도 되는듯 합니다.

 

구왕봉에서 바라다 보이는 문경쪽 조망입니다.

부처님오신날 딱 하루 일반인에게 공개한다는 봉암사도 보이고 뒤로 뇌정산(990m)모습도 드라나 보입니다.

 

 

 

뇌정산과 봉암사 뒤로 문경군 가은읍의 마을모습이 보입니다.

 

구왕봉에서 바라다 본 희양산... 거대암릉의 위용이 대단합니다.

 

희양산..

희양산은 문경시 가은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를 이루고 문경새재에서

속리산 쪽으로 흐르는 백두대간의

줄기에 우뚝 솟은 신령스러운 바위산이다.

산 중턱에서 정상 쪽으로 암벽을 두르고 솟은 모습이 특이하며

옛날 사람들은 희양산의 장엄한 암벽을 보고

"갑옷을 입은 무사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오는 형상"이라고 했다.

지증대사가 희양산 한복판 계곡으로 들어가 지세를 살피니

"산은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니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치며 올라가는 듯하고 계곡 물은 백 겹으로 띠처럼

되었으니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

듯하였다"고 감탄한 산이라고 전한다.

태백산을 일으켰던 백두대간 줄기는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휘어지면서 이 일대에서 가장 험준한 산세를

이뤄 놓았고, 이들 산 가운데 가장 빼어난 산이 바로 희양산이다.

 

희양산의 정상부 능선.을 망원으로 당겨보았습니다. .. 바위틈으로 산행하는 등반객들의 모습이 드믄 드믄 보입니다.

 

구왕봉에서 지름티재로의 백두대간길 등반로...구왕봉에서 급경사로 200미터 정도를 이러한 릿지 로프구간을 여러번 통과해야만 지름티재가 나옵니다.

거리는 1km가 채 안되는 구간이지만 매우 험한구간이라 초보자는 조심해야 합니다.(혹자는 셀프 클라이밍구간이로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수직에 가까운 로프구간도 여럿 있습니다.

 

지름티재...예전에는 한동안 희왕산 전체를 등반을 통재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스님들이 입산을 막는 초소로 사용한듯 합니다.

지금도 괴산군쪽으로만 입산이 허용되어 있고 봉암사가 위치하고 있는 문경군쪽응 희양산의 사유지로 철저하게 입산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봉암사에서 설치한 출입금지 목책으로 수백미터가 이렇게 가로막고 있습니다.

무단으로 통행하다 봉암사측 스님에거 적발되면 넘겨져 벌금이 70만원에 심지어 봉암사 경내에 한동안 억류한다는 소문까지....

그래도 새벽이나 한 밤중에 몰래 넘나드는 사람들이 있는걸로 압니다.

 

누군가 애교스럽게 아래애 나무가지를 지지대라고 대어놓았습니다..저런다고 저 큰 바위가 버티나요?

 

지름티재에서 희양산입구 삼거리까지 거리는 1km가 채 안되면서 고도차가 400m에 이르는 급경사 암릉구간으로 해발 700m에서 950m까지 200m가

특히 릿지구간으로 10~30m에 이르는 기나긴 로프가 중간중간 매여있고 거의 수직구간도 몇 있어서 매우 오르기 힘든구간입니다.

평일에는 그나마 손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주말에는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힌두시간씩 지체되는 코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말에는 이 등반로를 일방통행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고 계단을 설치하겠다는 계획도 있다고 하는데..자연은 자연 그대로 두는것이

가장 좋다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로프구간의 연속

 

 

드디어 희양산 정상부 암릉이 드러나면서 힘든 로프구간은 끝이 납니다.

 

 

지나온 구왕봉이 보입니다. 희양산보다는 100m 정도 낮습니다.

구왕봉 뒤로 좌측으로 막장성봉,장봉 우측으로 악희봉 멀리 칠보산과 속리산 국립공원군에 보이는 군자산도 조망됩니다....

 

 

멀리 속리산군이 바라다 보이는 마루금...

 

동북쪽으로는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주흘산의 부봉이 조망됩니다..

 

조령산과 뒤로 희미하게 월악산까지 조망이 되는군요.

 

희양산 정상부입니다.

 

정상에서 바라다 본 구왕봉

 

봉암사가 더 가까이 보입니다.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백화산(1063m)인듯 합니다.

 

주흘산(1106m)의 모습도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뒤로 멀리 주흘산 그 뒤로 운달산도 보인다는데...

 

좌측 주흘산 우측 백화산

칠보산쪽의 조망입니다...

 

속리산쪽의 조망

 

다시 구왕봉과 우측 악휘봉 뒤로 멀리 군자산의 조망...

 

하산길로 성터 삼거리입니다..

은티마을에서 성터갈림길을 통한 희양산 등반로는 위험구간 로프구간이 전혀 없은 매우 안전한 초보자 구간으로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데..

사람들은 굳이 백두대간길이라 해서 험하기로 소문난 구왕봉 구간을 고집하는 것은....

 

드디어 하산...은티마을 삼거리입니다.

 

은티마을에서 다시 바라다 본 희양산...스릴넘치는 암릉구간과 멋진 조망...

 

희양산 정상에서 망원으로 찍은 봉암사입니다.

이날이 부처님오신날이라 1년에 한번 일반인에가 사찰을 공개하는 날이라 많은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구요.

대웅전 앞에 신도들이 걸어놓은 연등(봉암사의 연등은 색이 없는 백색연등만 걸어놓습니다.)도 보입니다.

 

 

 

 

봉암사..소개(퍼 온 글)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희양산 봉암사



 


산사 속의 산사, 일년에 딱 하루만 산문을 여는 곳





 

[출처 : http://www.ohmynews.com/]



 



▲ 백두대간의 단전자리에 해당한다는 저 희양산 아래 일년에 딱 하루만 산문을 개방하는 봉암사가 있다.




20여년동안 일년에 딱 하루만 산문을 열어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는 절이 있다. 1982년 6월 3일 대한불교 조계종단에서 봉암사를 특별수도원으로 제정, 공고하며 봉암사는 물론 희양산 일대는 일반인들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일년에 딱 하루, 부처님 오신날인 4월 초파일 하루동안만 산문을 개방할 뿐이다.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고 하면 올 봄 전 종정 서암스님의 다비식과 같은 행사가 있을 경우에 있는 산문 개방이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곳이 절이라고, 대개의 절들은 부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한 포교의 일환으로 점점 개방화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어찌 보면 좀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도록 적극적으로 포교를 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보다 충실한 역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자비를 널리 알리고 뭇 중생들을 구제하는 구도의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봉암사는 그렇지 않다. 가는 사람이야 어찌하는지 몰라도 오는 사람은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다. 그러기에 봉암사에서는 일반인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 그렇다고 경내를 휘적휘적 걷고 있는 스님들을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숨죽인 듯한 조용함과 뭔가에 몰두하고 있는 그런 기가 느껴질 뿐이다



▲ 봉암사 진입로의 황톳길과 울창한 소나무 숲이 마음을 푸근하게 해준다. 


봉암사는 백두대간의 단전자리에 해당하는 희양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백두대간이란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기점으로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으로 맥을 뻗어 내려 태백산을 거쳐 남서쪽의 지리산에 이르는 국토의 큰 줄기를 일컫는다. 

국토의 척추와도 같은 대간에서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산과 강줄기들은 지역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 되었고, 삼국의 국경과 조선시대의 행정경계를 이루었다. 백두대간은 국토의 자연적 상징이며 동시에 한민족의 인문적 기반이 되는 산줄기라고 할 수 있다. 동양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동양의학에서 흔히 말하는 단전은 배꼽으로부터 9cm쯤의 아래 부위를 말한다. 선경(仙經)에서는 인체의 중요부분을 상단전(上丹田)과 중단전(中丹田) 그리고 하단전(下丹田)으로 나뉘고 있다. 상단전은 뇌에 해당하며 중단전은 심장에 해당하고 하단전이 바로 배꼽 아랫부분으로 정(精)을 간직하고 비축하는 곳이라 한다. 요즘 세간의 이목을 받고 있는 기수련이나 단전호흡 등을 통하여 정기(精氣)를 모으려 하는 곳이 단전이다. 

바로 백두대간의 이런 단전자리가 희양산이며 그곳에 산사 속의 산사라고도 하고 한국불교정신의 최후 보루라고도 하는 봉암사가 있다.



▲ <희양산봉암사>란 편액을 달고 있는 일주문이 한가해 보인다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때인 879년 지증도헌 국사가 창건하였다 한다. 당시 심층거사란 불자가 지증도헌 대사의 명성을 듣고 희양산 일대를 희사할 테니 수행도량으로 만들 것을 간청하였다 한다. 그러나 대사는 이를 거절하였었다.

그러다 희양산 일대를 불러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싸여있는 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며 경탄하였다 한다. 그리고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 하며 대중을 이끌고 절을 지었다 한다. 

봉암사를 찾아가는 길은 산세가 만만치 않다. 쌍곡계곡을 지나 15분쯤 더 가면 되지만 꼬불꼬불한 포장도로가 산세를 실감케 해준다. 절세가인의 선녀가 목욕을 할 것 같은, 옥빛 폭포수 가득한 하트모양의 용추폭포가 있는 대야산을 우측으로 하여 몇 분 정도 더 가면 봉암사로 들어가는 가은초등학교 희양분교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서 좌회전하면 저 만치 떨어진 곳에 와∼하는 감탄사가 나오게 하는, 웅장한 규모의 흰색 바위산이 보인다. 와∼하고 감탄을 낳게 하는 그 산이 바로 희양산이다. 포장된 길을 따라 3Km쯤 더 달리는 포장도로 좌, 우측엔 커다란 느티나무들이 있고 그 아래 당집이 있다.



▲ 봉암사는 희양산 자락에 이렇게 자리잡고 있다 


너럭바위에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발견하고 몇 가구되지 않는 동네로 들어서 포장이 끝날 때쯤 출입을 제한하는 안내판과 길을 가로막고 있는 쇠사슬이 보인다. 그리고 그곳에 경비초소가 있다. 

초소를 지난 진입로는 흙 길이다. 구불구불 멋대로 자란 소나무 빼곡한 흙 길을 걷는 기분이 새삼스럽다. 한참을 걸어 안으로 들어가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이쯤에 들어오면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다른 또 하나의 흰색 바위산이 안쪽으로 보인다. 봉암사는 밖에서 보았던 바위산이 뒤를 감싸고 멀리보이는 또 다른 바위산이 좌측을 감싸고 있는 것이다.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곧장 올라가면 일주문을 지나게 된다. 갈림길부터 일주문으로 가는 길 우측으론 맑은 물이 넉넉히 흐르는 계곡이 나란히 흐른다. 일주물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침류교(枕流橋)를 건너 전각들이 있는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서 침류교를 건너지 않고 계곡과 나란한 소로를 따라 계속 올라가면 마애불이 있는 곳으로 가게된다. 

오른쪽으로 침류교를 지나 남훈루(南薰樓) 아래를 통과하면 정면으로 한 단 높게 자리잡은 대웅보전이 보인다. 넓은 마당을 가운데로 하여 좌측에 성적당(惺寂堂)이 있고 우측에 보림당이 있다. 대웅보전 우측엔 극락전이 있고 그 옆으로 점화실이 있다. 극락전과 점화실 뒤편에 작은 규모의 산신각도 있다. 마당을 벗어난 성적당 뒤쪽에 3층석탑과 금색전이 있다. 그리고 금색전 뒤쪽에는 조사전이 있다.





▲ 앞산에 있는 바위에 오르니 선원과 대웅보전 그리고 금색전과 조사전 등 봉암사 경내의 모든 전각들이 한눈에 보인다. 좌측에 있는 전각이 선원이며 아래 사진이 대웅보전이다. 


3층석탑과 비로자나부처님이 주불로 모셔진 금색전 그리고 희양산 정상은 일직선을 이르고 있다. 현재의 대웅보전이 불사되기 전까지는 금색전이 봉암사의 대웅전이었다고 한다. 그런 역사성 때문인지 금색전 뒤쪽엔 <대웅전>이란 편액이 그대로 걸려있다. 

3층탑 좌측에 있는 범종각에서 좌측으로 가려하면 다시금 일반인 출입금지 푯말이 보인다. 이 곳이야 말로 일반의 출입이 철저하게 금지되는 구역이다. 봉암사와 연이 닿는 신도라면 사전에 허락을 받아 이곳 경내까지 출입은 가능하다. 그러나 이 곳, 스님들이 수도정진을 하고 있는 선방이라고도 하는 이곳은 출입이 불가능하다. 

출입이 제한되는 봉암사에서도 더더욱 출입이 통제되는 이곳이 바로 <曦陽山門太古禪院(희양산문태고선원)>이란 편액을 달고 있고, 스님들이 수도정진하고 계신 선원이다. 

분위기가 그렇고 국내최고의 선방이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발걸음도 조심스럽고 숨이라도 몰아쉴까 호흡을 가다듬게 된다.



▲ 한국최고의 선원이라고 하는 봉암사 선방이다. 운 좋게 봉암사 경내까지 들어온 신도들도 이곳엔 들어갈 수가 없다. 


참배를 마치고 경내를 두루 돌아보고 남훈루를 나와 다시 침류교를 건너 오솔길 같은 소로를 따라 걷는다. 말 그대로 오솔길이다. 사람이라도 마주치게 된다면 한 사람은 길을 벗어나 피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인적이 없는 곳이기에 그런 일은 없을 듯 하다. 오솔길을 따라 5분 정도 올라가면 다시금 경탄을 토하게 된다. 

심산유곡 깊은 골짜기에 가슴이 후련하도록 넓은 바위에 물이 흐른다. 흐르는 물이 너무 맑아 감히 손을 대기가 어렵다. 속세에 찌든 업보가 한 방울 떨군 먹물이 퍼지듯 그렇게 표시 날까 주춤거리게 한다. 움푹 패인 석지(石池)에 잠시 머물던 물은 다시 흐른다. 

그런 마당바위 위로 큼직큼직한 바위가 군데군데 조화롭게 놓여있다. 자칫 바위뿐인 단조로움을 달래려는 듯 주변과 잘 어울리는 노송들이 가지를 드리워 청색을 더하고 있다. 그런 한쪽 커다란 바위에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마애불은 희양산 정상에 시선을 맞춘 듯하다. 

너럭바위 군데군데 차곡차곡 올려 쌓은 돌탑들이 간직했을 정성이 가슴을 찡하게 한다. 선원에서 화두를 놓지 않고 있던 스님들이 잠시 머리를 식힐 겸 다녀간 흔적인지 아니면 훌쩍 다녀간 누군가의 흔적인지 모르지만 높지 않은 돌탑들이 꽤나 여러 개 있다.



▲ 3층석탑과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셔 놓은 금색전으로 희양산 정상과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현재의 대웅보전이 불사되기 전까지는 이 금색전이 봉암사의 대웅전이었다고 한다. 


들리는 소리는 물소리와 솔잎을 스치는 바람소리뿐이다. 속세에선 소음으로 들리던 매미소리도 이곳에선 마음을 일깨워 머릿속을 비워주는 자연의 가르침으로 들린다. 

속세의 습관을 버리지 못해 조용한 산사에서조차 허둥대느라 송골송골 맺었던 땀방울이 사라지고 서늘함마저 느껴질 즈음 계곡과 나란히 어깨동무 하고있는 오솔길을 따라 오르던 길 다시 내려온다. 

침류교가 있는 곳, 일주문서 올라와 마애불로 가는 길과 대웅전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이곳은 아주 작지만 사거리가 되는가 보다. 대웅전에서 바라 본 앞산 바위를 향하여 발길을 옮긴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산길로 접어든다. 가파른 비탈을 한동안 오르니 바위에 서게 되고 봉암사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거대한 하나의 암석덩어리로 꽃술 모은 연꽃형상을 하고 있는 희양산의 산세가 오묘하다. 어루만져 만든 듯 곡선을 그리며 뾰족이 솟은, 풀 하나 없는 듯한 희양산 꼭대기 바위는 하늘을 찌를듯하나 다시금 살펴보니 하늘의 정기를 받고 산의 지기를 모아 봉암사에 맺게 하는 듯하다.



▲ 단청되지 않은 요사채가 한결 고풍스러운 느낌을 준다. 


담장에 둘러싸인 선원이지만 공간을 헤치고 들어가는 눈길은 어쩌지 못해 출입을 허락하는 모양이다. 바위에서 내려다 본 선원은 다소곳한 구도에 정갈함을 느끼게 한다. 분명 정진중인 스님들이 다수 계실텐데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질 않는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곳이 절이라고는 하지만 대개의 절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길 바랄지도 모른다. 그 바람 속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하고자 함도 있겠지만 절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하는 것과 같은 다른 의미도 있을지 모른다. 

오는 사람을 막고있는 봉암사는 어떻게 이해를 하여야 할까? 봉암사는 특별수도원이다. 스님들이 공부를 하고 깨우침을 얻고자 수도하고 계신 도량이다. 물론 다른 절들도 스님들이 정진하고 계신 수도도량이지만 대중을 상대로 포교와 가르침 그리고 구도가 병행되는 곳이다. 

주변환경이 그렇다 보니 하나의 화두에 몰두하기엔 장애가 있을지도 모른다. 속인들과의 반복된 만남은 출가할 때의 마음을 흩어 놓아 부처님 가르침을 소홀히 하고 깨달음을 위한 고행을 게을리 하게 할지도 모른다.



▲ 마애불을 찾아가는 오솔길과 마당바위에 층을 이루고 있는 돌탑과 늘어진 소나무가 잘 어울린다 


그런 마음을 다잡고 다시금 승보의 길로 가기 위한 각오를 다지게 하는 곳이 바로 봉암사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 보면 한국불교의 교리와 정신 그리고 스님들이 따르고 지켜야할 모든 것을 계승하고 보존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된다. 

등산과 산사출입을 통제 받는 일반인들의 푸념 섞인 불만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속세에 오염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 보존되며 한국불교의 진면목을 고이고이 전수하는 그런 곳으로 존재할 필요가 있는 곳이라 생각된다. 

자연은 왠지 구불구불하고 제 멋 대로인 무질서를 연상하게 하고 개발은 반듯반듯하고 차곡차곡 한 질서를 상징한다. 봉암사는 구불구불하고 제멋대로 인지 모른다. 그 구불구불함과 제멋대로가 자연이라면 봉암사는 먼 후일까지 산사 속의 산사로 보존되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질서와 무질서를 가름하는 그 자체가 인간들의 착각이며 아집이 만들어낸 허구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 높이가 5m 가까이 되는 커다란 바위에 조각된 마애불은 봉암사 정산에 눈길을 맞추고 있는 듯하다. 


경내 이곳저곳에서 셔터를 눌러대는 기자의 울긋불긋한 복장에 주지스님이 불편한 심기를 바람에 흩어지는 구름인 듯 완곡히 표현하신다. 봉암사에서 소임을 맡고 계신 모든 분들이 사문으로부터 말을 듣고 있다고. 

이루고 싶은 소망하나쯤 항상 간직하고 있는 삶이 아름답듯 가보고 싶은 곳 하나쯤 간직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봉암사를 가보고 싶은 그런 곳으로 간직해도 좋을듯하다. 찾지는 말고 그냥 가보고 싶은 곳으로 만 간직하길 바란다. 그러다 꼭 가고싶으면 몇 달쯤 마음을 다져 큰맘먹고 산문을 개방하는 사월 초파일 찾아가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가보고 싶은 곳을 사랑하는 마음이며 지키고자 하는 분들에 대한 도리라 생각된다.

봉암사역사
..▶ 봉암사 창건

..봉암사는 지금부터 약 1100여년전 신라 헌강왕 5년에 _지증국사께서 창건한 고찰로서 선종산문인 구산선문의 일맥인 희양산문으로 그 사격이 매우 당당하다.

당시 이곳은 신라 문화의 정수인 선풍을 크게 일으켜 구산선문 가운데 희양산파의 주봉을 이루었던 곳이다. 특히 신라 제 49대 헌강왕은 화풍으로 소폐하고 혜해로 유고할 유신정치를 뜻하고 이었는데 이런 헌강왕의 개혁 의지에 이념을 제공한 것이 지증대사의 선이었다.

..▶ 중창불사

...그후 봉암사는 고려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였는데 고려시대에도 많은 고승을 배출하여 불교중흥을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던 대선찰이다. 그런데 조선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사찰 건물이 소실된 것을 불기 2499년(1955) 금색전 을 비롯해 여러 건물을 다시 건립하였으며 최근의 도량으로 모습을 일신하게 되었다.

..봉암사는 불기 2526년(1982)부터 종립선원으로 희양산 남쪽 너른터에 자리하고 있다. 희양산은 백두대간의 단전에 해당하는 높이 998m의 거대한 바위산으로 서출동류하는 30리 계곡을 끼고 있어 천하 길지로 이름나 있다. 멀리서 보면 우뚝한 모습이 한눈에 영봉임을 알수 있는데 봉황과 같은 바위산에 용과 같은 계곡이 흐로고 있어 예로 부터 봉암용곡이라 불렀다.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때인 879년 지증도헌 국사가 창건하였다. 당시 심층거사가 대사의 명성을 듣고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여 수행도량으로 만들 것을 간청하였다. 대사는 처음에 거절하다가 이곳을 둘러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쌓였는 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며 경탄하고 "이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것이다" 라 하며 대중을 이끌고 절을 지었다.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개산하여 선풍을 크게 떨치니 이것이 신라 후기에 새로운 사상흐름을 창출한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이다. 그 후 후삼국의 대립 갈등으로 절이 전화를 입어 폐허화되고 극락전만 남았을 때인 고려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여 많은 고승을 배출하였다. 조선조 세종대왕때 험허당 기화 스님이 절을 중수한 뒤 머물면서 원각경소 를 저술하였고. 1674년 다시 소실된 절을 신화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703년다시 중건하였으나 이후 크게 쇠퇴하였다.

..구한말 1907년 의병전쟁 때에 다시 전화를 입어 극락전과 백련암만 남고 전소되었다. 1915년 윤세욱스님이 요사와 영각, 창고 3동을 신축하였고, 1927년에는 지증대사의 비각과 익랑을 세웠다. 근래에 들어 당시 조실을 지낸 전 조계종 종정서암스님과 주지 동춘스님 후임 원행, 법연스님등의 원력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여 수행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지증대사 적조탑, 지증대사적조탑비, 정진대사 원오탑,정진대사 원오탑비, 봉암사 삼층석탑등의 성보문화재가 옛 선사의 향기를 은은하게 전하고 있다.

 

..▶ 선원의 역사

봉암사 선원의 역사는 저 멀리 신라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증대사 도헌스님이 구산선문중 하나인 희양산문을 이곳에서 개창하였던 것이다.

..이후 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사찰의 소임을 볼때는 이 봉암사에 3천여 대중이 머물러 동방장과 서방장으로 나누어 정진을 할 정도였다.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져 '태고 보우국사'를 비롯한 많은 수행자들이 이곳에서 정진하여 "동방의 출가 승도는 절을 참배하고 도를 물을 때 반드시 이곳 봉암사를 찾았다" 고 한다. 이렇게 유서 깊은 선사 봉암사에 근대 선원이 다시금 부흥된 것은 1947년이다.

..해방직후 사회적 혼란이 극심한 상황에서 봉암사는 한국불교의 현대사에서 새로운 흐름을 창출한 결사도량으로 거듭난다. 이름하여 '봉암사 결사' 가 그것이다. 봉암사 결사는 1947년 성철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우봉스님등 4인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을 세우고 결사도량을 찾으니 그 곳이 봉암사였다

..그 후 청담. 행곡. 월산. 종수. 보경. 법전. 성수. 혜암.도우등 20인이 결사에 참여하였다. 당시 결사대중은 공주 규약을 제정하여 추상같은 법도를 세워 오늘날 수행의 근간을 세웠던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결사정진도 1950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단되는 안타까운 현실에 처하게된다. 그후 1970년 초부터 다시 수좌들이 봉암사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불교신문 기록으로 보건대 봉암사 희양선원은 1972년 향곡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15명의 납자가 정진했다. 이후 1974년에 서옹스님이 조실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78년까지 향곡스님이 줄곧 조실역활을 하면서 납자를 제접했다.1980년경 서암스님이 정식으로 태고선원 조실로 모셔지면서 선원은 청룡의 승천과 봉황의 날개짓처럼 웅대한 자태를 희양산 자락에 펼치게 되었다.

..1982년 6월 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여 성역화 의지를 표명하였다. 1982년 7월 문경군에서는 사찰 경내지를 확정 고시하였다 그래서 희양산 봉암사 지역은 특별 수도원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동방제일 수행 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이어 1984년 6월 제 13차 비상종단 상임위원회에서는 선풍 진작과 종단 발전을 위해 봉암사를 종립선원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1994년 범룡스님이 조실로 추대되어 2년여간 납자를 제접하여오다, 2000년 하안거 해제에 진제스님을 조실로 모셨으며 그후 2001년 하안거 결제에 서암스님을 다시 조실로추대하여 대중 스님들을 지도 하시다가 2003년 3월 29일 날 열반에 드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