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권 등산 기록/경상북도(대구,울산) 산행기록

팔공산 치산계곡, 수도사, 거조암

섬돌7 2015. 3. 19.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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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산계곡

위치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치산리 311

팔공산 주봉 북쪽 자락에 들어앉은 계곡이다. 치산 저수지에서 약 1km 올라가면 신라 선덕여왕 14년에 원효대사와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 수도사가 있으며

상류에는 신령재와 고려 문종시대에 흥암 혼수대사가 창건한 진불암을 만날 수 있다. 수도사에서 계곡을 따라 약 1.6km 올라가면 치산폭포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폭포는 팔공산에 산재해 있는 폭포 가운데 가장 낙차가 크고 낙수율이 풍부하다. 팔공산 남쪽과 서쪽으로부터 에워싸고 있는 광활한 일대의 원시림지대에서

 흘러내리는 폭포는 3단을 이루고 있어 장관을 이룬다. 온갖 형상의 기암석과 울창한 숲으로 풍치미 또한 뛰어나며,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을 자랑한다.

계곡의 맑은 물과 호수는 주변의 산세와 조화를 이루에 경관이 좋다. 또한 주변 관광지로는 제 2석굴암, 팔공산 순회도로와 연결되어 있으며,

등산로는 수도사 - 치산폭포 - 동봉 - 동화사 - 갓바위로 연결되어 있다.

 

 

 

공산폭포

 

 

수도사

 

 

 

 

 

 

 

 

 

 

 

 

 

거조암

동의어 거조사(居祖寺) 다른 표기 언어 居祖庵

 

[내용]

거조사(居祖寺)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銀海寺)의 산내 암자이다. 693년(효소왕 2)원효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경덕왕 때

왕명으로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 뒤 고려시대에는 지눌(知訥)이 송광사에 수선사(修禪社)를 세워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이룩하기 전에 각 종파의 고승들을 맞아 몇 해 동안 수행했던

사찰로 유명하다.

1182년(명종 12)지눌은 개성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하여 동료들과 함께 선정(禪定)을 익히고 힘써 지혜를 닦자는 맹서의 글을 지어 후일을

기약하였다.

1188년 봄에 거조사의 주지 득재(得才)는 지난날 결사를 기약했던 수행자를 모으고, 당시 경상북도 예천의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 머물렀던

지눌을 청하여 처음으로 이 절에서 정혜결사를 시작하였다.

그 뒤 이 결사는 송광사로 옮겨갔다. 1298년(충렬왕 24)원참(元旵)이 밤중에 낙서(樂西)라는 도인을 만나 아미타불 본심미묘진언(本心微妙眞言)과

극락왕생의 참법(懺法)을 전수받아 기도도량으로도 크게 부각되었다.

그 뒤의 역사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근래에는 나한 기도도량으로써 3일만 지성껏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많은 신도들이 찾아들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국보 제14호로 지정된 영산전(靈山殿)과 2동의 요사채가 있다. 영산전 안에는 청화화상이 부처님의 신통력을 빌려 앞산의 암석을 채취하여

조성했다는 석가여래삼존불과 오백나한상, 상언(尙彦)이 그린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그 중 법계도(法界圖)를 따라 봉안된 나한상은 그 하나하나의 모양이

특이하고 영험이 있다고 전한다.

이 밖에도 영산전 앞에는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높이 3.6m의 삼층석탑 1기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4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당 내부 퍼 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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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 기사

 

부처가 된 5백여 도둑, 인간사 희로애락 대합창

 
국 보 제14호인 거조암 영산전에는 526분의 석조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소를 훔치려 했던 500여명의 도둑이 죄를 뉘우치고 성불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비록 세속에서 살더라도 불도를 닦아 도를 깨치면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교훈이 담긴 이야기이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1

‘영천 청통면 신원리에 있는 거조암 영산전에는 도둑들이 우글거린다?’

설 마 하고 사람들이 영산전을 들여다보니 500여명의 나한이 일제히 쳐다보는데, 괜히 겁이 덜컥 나더라고. 사람들이 들여다보지 않을 때면 나한들이 둘러앉아 자신들의 이력을 왁자지껄하게 이야기하는데, 거의가 도둑질한 내용을 펼쳐낸다는 것.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 때문에 그런 일도 생각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지금부터 1천 수백 년 전 이야기다.

영 산전에 도인 스님이 살고 있었다. 이 스님이 하루는 산을 내려가다가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산비탈의 조밭 가에 앉아 잠시 쉬는 참이었다. 가을 기운이 삽상한 가운데 하늘이 맑아 누렇게 변해가는 들과 산색이 고왔다. 흥얼흥얼 염불이 절로 나왔다. 탐스럽게 익어 고개를 숙인 조를 만지면서 스님은 풍성한 계절감을 만끽했다.

그런데 아뿔싸, 큰일이 벌어졌다. 아마도 흥에 겨워서 그랬는지 조 이삭 세 개를 부러뜨린 것이다. 일어서서 갈 길을 가려다 스님은 그걸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아이고, 이를 어쩌나? 농부가 애써 가꾼 농사를 망가뜨리다니, 큰 죄를 지었구나. 이를 어쩌나?”

스 님은 망연자실하여 그 자리에 못이 박힌 채 “이를 어쩌나?”를 반복해서 말하기만 했다. 그까짓 조 이삭 세 개를 부러뜨린 게 무슨 큰일이냐고 하겠지만, 스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하는 일이 지극한 도의 길을 가는 일이니,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마음에 걸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때로 무심코 한 일이 큰 죄의 빌미가 되는 것임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알아야 하는 게 수행자의 마음이다. 평생 수행을 성실하게 해온 그에게 남이 한 해 동안 고스란히 땀 흘려 가꾸어온 조 이삭 세 개를 부러뜨린 건 큰 실수라고 여겨진 것이다.

“도의 길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런 작은 실수라도 빠뜨림 없이 참회해야 한다. 그 실수의 마음을 털끝만큼이라도 남아 있지 않게 참회로 지워야 비로소 완전한 도인의 길을 열 수 있을 게 아니겠는가.”

스 님은 한참을 안절부절못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산 아래 동네로 발길을 돌렸다. 조밭 주인은 동네에서 성실하게 농사일을 해온 사람임을 알아냈다. 집도 찾아냈다. 저만치 농부의 집이 보이는 마을 어귀에서 스님은 문득 황소로 자신을 변모시켰다. 누런 황소가 “움머” 하고 소리를 쳤다.

“마음을 잘못 다잡아 남의 조 이삭 3개를 부러뜨렸으니, 3년 동안 조밭 주인댁에서 일을 해주어서 죄를 갚으리라”고 황소로 변한 스님은 다짐했다.

황 소가 집 마당으로 쑥 들어오자 놀란 건 농부였다. 쫓아내도 도무지 나가려 하지 않았다. 농부는 외양간에 소를 넣어두고는 마을을 돌며 소 주인을 찾았다. 아무도 소를 잃지 않았다고 했다. 인근 마을에도 알아보았으나 소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네. 나중에라도 소 주인이 나타나겠지.”

농 부는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소를 집에서 돌보기로 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소는 주인을 지극히 따랐다. 언제나 먼저 주인을 앞서서 밭일이나 논일을 했다. 사람보다 낫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고삐도 매지 않고, 일을 시키지도 않았지만, 알아서 집안일을 챙겼다.

“그 참 신통하네.”

동네 사람들도 한결같이 소를 칭찬하며, 농부에게 큰 복을 만났다고 격려해 주곤 했다. 이 소문은 멀리 퍼졌다. 문득 누가 찾아왔다. 인상이 고약했다.

“이 소는 내 소니 몰고 가겠소”라고 그는 말했다.

“그 렇습니까? 소를 잃어버려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습니까? 당연히 데리고 가셔야지요.” 농부는 반색하며 소를 내놓았다. 그러나 소는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완강하게 버티면서 그를 들이받을 듯이 위협했다. 그는 결국 머쓱해서 돌아가 버렸다. 계속해서 사람들이 찾아왔으나 소는 한결같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찾아온 이가 500명이나 됐으나 다 허탕을 쳤다. 그러는 가운데 3년이 훌쩍 흘러갔다. 다시 들판이 가을빛으로 물들었다. 농부는 수확한 벼와 콩을 거두느라 열심히 일했다. 아침에 들에 나가려던 그는 소가 전과 달리 의젓한 모습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게 신기해서 가까이 다가가 목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소가 말을 하는 것이었다.

“주인님, 이제 때가 됐습니다.”

농부는 깜짝 놀라 사방을 돌아보았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해서 소를 바라보자 소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제 저는 가야 합니다.”

“아이고, 이를 어쩌나?”

농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무 놀라운 사태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이고, 저를 용서하십시오. 제가 이렇게 신령스러운 이를 몰라보고 마구 부렸으니 죄가 너무 큽니다.”

겁이 난 농부는 무조건 소에게 잘못했다고 빌었다. 그러나 소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문지르며 낮은 소리고 말했다.

“아닙니다. 주인님은 큰 복을 받은 겁니다. 그동안 일을 했으니 품삯을 주는 셈 치고 내일 잔치나 한 번 거나하게 베풀어주십시오. 인근 동네까지 소문을 내어 많은 사람이 오게 하십시오.”

잔 치가 벌어졌다. 소 덕분에 부자가 된 농부는 인근 사람을 다 불러서 큰 잔치판을 마련했다. 소를 데리고 와서 춤을 추기도 했다. 사람들이 한참 흥이 높아졌을 때였다. 소가 짙은 안개를 내뿜었다. 그러고는 안개 속에서 어느 틈에 스님으로 변신해 합장을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놀라 스님에게 합장했다. 스님은 말했다.

“내가 소로 있을 때 자기 소라며 찾으러 온 이들은 썩 나오거라.”

추상같은 소리에 500명이 앞으로 나왔다. 인근의 산적들이었다.

“나 는 3년 전에 실수로 조 이삭 3개를 꺾고 그 죗값으로 소가 되어 이 집에서 3년을 일해 주었다. 그런데 너희들은 남의 소를 갈취하려는 도적의 마음을 먹었으니 무엇으로 죗값을 치르겠느냐? 소가 되어 치르겠느냐? 참회하여 성불을 하겠느냐?”

모두 무릎을 꿇고는 스님을 따르겠다고 했다. 스님은 그들을 거조암으로 데리고 갔다. 그들은 열심히 도를 닦아 성불하여 나한이 됐다. 지금 거조암에 안치된 500나한은 그렇게 자리하게 된 것이다.


#2

거조암 영산전은 정확하게는 석가모니불과 526분의 아주 다양한 표정의 석조 나한상들을 모시고 있다.

나 한이란 아라한의 준말이다. 경전에 보면 이들은 저잣거리의 무뢰배인데,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앞의 도적 이야기도 이런 내용을 토대로 민간에서 만들어진 설화라 하겠다. 아라한은 ‘응공(應供)’ 또는 ‘응진(應眞)’으로 번역된다. 응공이라 하는 것은 공양받아 마땅한 분이라는 의미다. 오백나한은 500명의 아라한과를 증득한 존자, 즉 성인의 무리로서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석가모니 멸도 후 1차 결집 시에 모인 가섭존자를 비롯한 500여명의 여러 스님을 가리킨다고도 한다. 사찰에서는 부처의 10대 제자나 16나한, 18나한, 500나한 등을 모셔 신앙의 대상으로 한다.

이들 나한상은 이 절의 창건주인 법화 스님이 발원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전설도 있다. 아미타불에 지극하게 기도를 드려 성불한 그는 그 신통력으로 앞산의 바위를 조각하여 모시게 됐다고도 한다. 그 배열에 있어서도 신통력을 발휘하여 각 불상이 스스로 제자리를 잡고 앉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설화들은 연대적으로 맞지 않다. 훨씬 후대인 조선 순조 5년(1804) 영파 성규 스님이 조성한 것이라는 게 가장 믿을 만하다.

이곳 나한상들의 모습이 사실적이면서 해학적이고, 서민적이라 이런 설화가 만들어져 인근 신도들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로 번지면서 친근하게 다가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500여 나한은 세속의 갖가지 표정을 망라해서 보여주고 있다. 한 사람도 같은 얼굴이 없다. 유머러스하면서도 희로애락의 표정이 잘 나타나 ‘인간 희로애락의 대합창’(강우방)이라 말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곳에 참배하는 이들은 누구나 자기를 꼭 닮은 상을 찾아낼 수 있단다. 비록 세속에서 살더라도 지극하게 불도를 닦아 도를 깨치면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교훈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예라 할 것이다.

거조암은 당초 거조사(居祖寺)라 했다. 은해사보다 먼저 창건됐다. 그 시기는 신라 효성왕(孝成王) 2년(738)이며, 창건주는 원참조사(元祖師)다. 경덕왕(景德王·742∼764) 때 창건했다고도 한다. 우리나라 조계종의 종조인 보조국사 지눌이 3년 동안 수도하면서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을 작성한 곳으로 유명한 절이기도 하다.

은해사와 거조사의 관계는 언제부터 맺어졌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근래에 와서 은해사를 본사(本寺)로 하고 거조사는 그 말사(末寺)로 편입되어 거조암이라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거조암의 영산전은 해체 보수 시에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고려 우왕(禑王) 원년(1375)에 건립되었으며,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고 한다.

거조암 영산전 앞에는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104호인 삼층석탑이 있다. 박관영기자

Story Tip 거조암은

은해사보다 먼저 창건된 산내 암자… 지눌의 정혜결사 운동 진원지이기도

거조암은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팔공산 동쪽 기슭에 있는 사찰이다. 영산전의 500여 나한을 중심으로 한 나한기도 도량으로 유명한 것은 물론, 고려시대 정혜결사(定慧結社)가 처음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정 혜결사는 정(定)과 혜(慧)를 함께 수행해야 한다는 정혜쌍수론(定慧雙修論)을 바탕으로, 세속화되고 정치와 연관되어 타락한 불교를 지양하고 선(禪) 수행에 전념하자는 운동이다.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知訥·1158~1210)은 정혜결사를 하기 이전에 각 종파의 큰 스님들을 맞아 거조암에서 몇 해 동안 수행을 했다고 한다. 이후 1182년(명종 12) 지눌은 개성 보제사의 담선법회에 참여해 선정을 익히고 수행에 힘쓰는 동료들과 함께 맹문(盟文·정혜결사문)을 지어 후일을 기약한다. 마침내 1188년(명종 18) 봄 거조암 주지 득재(得財)가 지난 날을 기약했던 수행자를 다시 모으고, 당시 예천의 하가산 보문사에 머물러 있던 지눌을 청해 거조암에서 처음으로 정혜결사를 열었다.

이후 1298년(충렬왕 24) 정월 원함이 낙서라는 도인을 만나 아미타불 본심미묘진언(本心徵妙眞言)과 극락왕생의 참법을 전수 받아 기도도량으로 크게 이름을 알렸다. 고려 우왕 원년(1375)에는 영산전(靈山殿·국보 제14호)을 건립해 법등이 이어졌으나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이미 폐사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후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거조암 내 현존하는 건물로는 영산전(국보 제14호)을 비롯해 삼층석탑(경북도 문화재자료 제104호), 요사채, 영산루, 산신전, 설선당 등이 있다. 석가여래삼존불과 오백나한상, 상언(尙彦)이 그린 후불탱화도 봉안돼 있다. 영산전 앞에는 고려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경북도 문화재자료 제104호) 1기가 있다.
이창남기자 argus61@yeongn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