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과 경주 교촌마을에 다녀왔습니다.
특별한 설명 없이 퍼 온 참고 자료와 사진만 올립니다.
중요민속자료 제27호인 경주최씨고택과 중요무형문화재 제86-다호인 경주교동법주가 자리잡고 있는 교촌마을은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배출한 경주 최부자의 얼이 서린 곳이다. 특히 최부자집에서 가훈처럼 내려온 원칙인 “벼슬은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 곳에는 원효대사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은 신라 요석공주가 살던 요석궁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며, 부근에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서려 있는 계림과 내물왕릉, 경주향교, 김유신 장군이 살았던 재매정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주 교촌마을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월정교...
‘원효대사는 월정교를 건너 요석궁에 들어갔다’고 전하는 경주의 월정교지는 통일신라시대 월정교 옛터이다. 이때에 원효대사는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주리요?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만들겠노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고 한다. 무열왕은 그 노래의 의미를 파악하고는 요석공주에게 원효대사를 보내도록 한다. 원효대사가 경주 남산으로부터 내려와 월정교(혹은 문천교蚊川橋)를 지나다가 자신을 찾고 있는 신하를 보고는 다리에서 떨어져 옷을 입은 채로 물에 빠지니, 신하는 월정교 바로 옆의 요석궁으로 원효대사를 인도하여 옷을 말리게 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머물게 되었다. 이때 얻은 아들이 바로 설총(薛聰)이고, 이후 원효대사는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60년 경덕왕(景德王 19) 때에 “궁궐 남쪽 문천(蚊川) 위에 일정교(日淨橋), 월정교(月淨橋) 두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춘양교(春陽橋)라고도 불리었던 일정교는 월정교의 동쪽으로 약 700m 상류에 위치해 있었다. 월정교(月淨橋)는 조선시대에 와서 월정교(月精橋, 淨->精)로 표기되었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길이 60.57m의 월정교 아래 교각 사이에서 불탄 목재와 기와편이 출토되어, 교각윗면이 누각과 지붕으로 구성된 누교(樓橋)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센 물살에 견디도록 교각을 배모양으로 쌓았다.
요석궁은 월정교터를 건너면 나오는 마을터에 있었다고 하며, 조선시대 경주 최부자집터로 바뀐 뒤에 현재는 음식점 등이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월정교 아래를 흐르는 문천(蚊川)에서는 지금도 고둥 등을 줍는 아낙들이 있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풍광을 만날 수 있다. 현재 월정교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 656년~660년경 원효대사 생애의 공간.
[네이버 지식백과] 월정교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원효대사 스토리뱅크), 2009., 한국콘텐츠진흥원)
경주 첨성대
이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 재위632-647 때 만들어진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대라고 하네요
화강석을 가공하여 조성한 기단 위에 27단의 석단을
원통형의 곡선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장대석을 우물정자형으로 축조하여
정상에는 천문을 살피도록 시설이 되어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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